Exhibition view, Winter Trees, Gallery Woduk, 2002


 

 

 

 

 

겨울나무 Winter trees, Gallery Wooduk, Seoul (2002)

 

나무를 긋다, 지우다, 스미다..... 

 

                                                                                                                              한생곤(화가)

 

타오르는 작은 성냥개비는 삶과 죽음의 동시진행을 보여주는 가까운 예이다. 사이좋게 조그만 종이상자에 누워있던 성냥개비들은 찾아오는 우연한 순서에 의해 하나씩 자신의 몸을 불꽃으로 바꾸며 세상을 쬐끔 더 밝고 따뜻하게 달구다가 곧 꺼져 버린다. 이 작은 성냥불의 수명은 불의 성질과 바람의 힘과 내 손가락의 참을성, 이 셋의 담합으로 정해진다. 하지만 이 바쁜 세상에 어느 누가 성냥개비 하나가 보여주는 불꽃의 사연에, 그 신비에 성냥개비 하나 만큼의 관심이라도 가지겠는가? 필요한 만큼 불 을 얻으면 이 성냥개비는 주로 '훅-'하는 입 바람 저승사자를 따라 연기되어 사라지고, 그 나머지는 길이나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혹 나처럼 한가한 사람이나 공책을 펼쳐놓고 이 성냥개비만한 관심과 실험정신으로 '목탄'이라고 써 준다면 그래도 이 성냥개비는 목탄이라는 이름은 남긴 행복한 성냥개비이다. 물기 없는 마른 몸에 불꽃이 깃들어 타 들어가니, 그 목이 얼마나 애탔으면 또한 목탄이 되었는가? 한 때는 나무였으나 인연에 따라 성냥개비가 되었고 다시 불을 만나서 목탄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난겨울 내내 언 땅에 꼼짝없이 박혀 겨울을 참아낸 그 침묵의 뼈, 그 속에 응축된 생명, 굴복하지 않는 겨울나무의 단단한 골기(骨氣)를 표현해보려고 임현락이 사용한 재료이다. 비록 성냥개비를 태운 숯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사용한 목탄과 겨울나무와 '북-북' 그어놓은 짙은 목탄선들에서 겨울나무 - 그 생명이 다한 생명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불을 통과하면서 본래의 나무에서 목탄이 된 이 재료는 다시 임현락이라는 화가의 손에 의해서 종이 위에 자신의 몸을 태운다. 이미 한 번 제 몸을 살랐던 이 까맣고 단단하며 거친 나무 가지는 선을 한 번 부-욱 그을 때 마다 닳고 닳으며 종이 위에 새로운 자아를 실현한다. 사막을 만난 물이 수증기가 되어 바다로 옮겨가듯, 종이를 만난 목탄은 화가의 손에 이끌려 화면에 부서진다. 이것이 부서지며 화가가 그리는 그림 속의 나무가 된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한 때 나무였던 목탄이 다시 그림 속의 나무로 태어나는 것 말이다. 참 황홀한 일이다. 한 때 나무였던 목탄이 화가의 호흡과 맥박소리에 춤추며 종이 위의 까만 불꽃으로 타오르는 이 현장 말이다. 참 묘한 일이다. 목탄이 닳으면 닳을수록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것이 성냥개비가 타면 탈수록 불꽃이 환한 것과 똑 같지 않은가 말이다. 죽어야 산다는 말만큼 이 경우에 맞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불을 살리고 스스로 죽어버린 이 목탄이 다시 죽어 획(劃)이 되었다. 이 획은 임현락의 격렬하고 부드러운 호흡에 따라 그어 간 목탄이다. 결국 한 때 나무였던 이 목탄은 화가를 만나, 그 옛날의 나무 가지를 연상시키는 생명의 획으로 부활하여 화면에서 춤을 춘다. 하지만 이때의 춤은 예전처럼 활활 타오르는 방식으로, 또는 바람에 술렁이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단단하고 단순하며 단호한 획의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이 획의 시작이 겨울-나무의 잔상과 나무의 골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목탄 자체의 성질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물기 흥건한 생명력은 볼 수 없지만 우리들이 만나는 겨울나무는 어딘지 모르게 성스럽고 신비롭다. 이 느낌을 임현락이 목탄의 마르고 딱딱하고 푸석푸석한 성질에서 찾은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임현락의 지난 그림에서 보여 지는 나무의 표현은 단 한 순간에 화면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그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작업을 하는 순간 사고의 개입이 허락되지 않는다. 먹이라는 재료는 일단 종이에 침투가 되면 수정이 불가능하고 마르기 전과 마르고 난 후의 느낌도 다르다. 그의 작업이 쾌도난마의 기세로 한 찰나에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은 먹이 가진 이러한 재료의 특성과 이 재료를 받아들이는 한지의 특성에 많이 좌우된다. 이 때문에 그의 이전 작업에는 '지우기'라는 항목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칼승부의 호흡에서 지우고 말고의 그런 여지가 처음부터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그림의 주 재료인 목탄은 다르다. 목탄은 연필이나 콘테 보다는 그 순간적인 가속능력이 뛰어나지만 먹과 모필에 비할 수 없다. 한 찰나에 자신의 감흥이 순식간에 전개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자동차경주에서 운전사가 밟으면 밟는 대로 차가 앞으로 쑥쑥 나가 주어야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먹은 한 번 밟을 때마다 순식간에 앞으로 빠져나가는 고속자동차와 같다면 목탄은 이에 비해 한 참 느리다. 긋고 부비고 다시 긋고 부벼도 그 속도는 느리며 이 때문에 먹으로 하는 작업에 비해 더욱 많은 반복과 더욱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임현락은 최근 이처럼 많은 노동이 필요한 목탄작업에서 이전 먹 작업보다 더욱 '치열한' 느낌을 받는다. 이 대목을 더욱 가열 차게 만드는 것은 강성일변도로 나아가 고착된 목탄의 짙은 색들을 다시 부드럽게 조율하는 지우기의 노동이 더하여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북북 긋고 다시 지우고 다시 긋고 지우는 이 작업이 요구하는 신체의 움직임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규칙, 불규칙한 리듬이 임현락의 맥박을 더욱 뛰게하여 작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작업 그 자체 속의 충만한 생명력에 몰입하게 한다. 

 

음양의 관점에서 볼 때 바탕이 되는 종이는 땅의 수용능력과 배태능력을 가지고 있고, 모필은 이 대지를 경작하는 쟁기의 역할을, 화가는 쟁기를 경영하는 농부의 역할을 맡는다. 여기서 이 대지에 뿌려지는 씨앗은 화가의 뜻이다. 그러므로 그림에서 '스민다'는 동사가 갖는 창조적인 의미는 대지를 적시는 빗물이나 모종을 위한 늪처럼 그 배태능력과 더불어 씨앗을 뿌리는 생식의 느낌이 있으며 이런 생식을 위한 사랑의 행위 또한 연상되는 매우 은근한 개념이다. 먹물이 화선지에 스며들듯 사랑은 내 마음에 스며들고, 화면에 뜻의 꽃이 피어나듯 창조의 자궁에서 약동하는 가능성들이 미래를 준비한다. 봄은 얼어붙은 대지에 스며들고, 그 생명의 수액은 뭇 생명의 혈관을 통해 흐르며, 온 봄 구석구석 세포들에게 그 에너지를 실어 나른다. 땅의 열기에 아지랑이들은 대기 속으로 스며들며 공기 중의 무거운 물들은 다시 대지로 스며든다. 스미고 스미고 스미고, 스며들고 스며들고 스며드는 가운데 땅과 나무에는 신록이 돋아난다. 시무룩한 가지에 생명이 스밀 때 피어난 꽃잎은 다시 완만한 속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묵묵한 바위 또한 알갱이 한 알 한 알의 단위로 시간 속에 스며든다. 시간은 공간으로 스며들고 공간은 시간으로 깃들어가며 무지개의 색 띠들은 다시 빛으로, 빛은 다시 무지개로 스미고 깃들인다. 임현락이 북북 그은 목탄은 그 힘으로 종이에 홈을 만들고 이 압력으로 종이의 조직들은 그 힘들을 기억하고 간직한다.

 

긋는 선에서 떨어지는 미세한 알갱이들은 때로는 부벼지고, 때로는 엉겨 붙어 인연의 불가사의한 경로의 그물망으로 제 갈 길을 간다. 스밈은 사랑이지만 때로는 죽음이다. 목탄이 종이에 부벼지며 스며들고 정착되는 과정은 인생이 대지에 스며드는 그 최후의 과정과 같다. 긋고 지우고 스며들어가는 화가의 행위에는 자연의 탄생과 소멸과 사라짐의 신비가 함께 섭리한다. 우리들이 화가의 작품에서 보다 큰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작은 성냥개비 하나의 불꽃에서 뭇 생명의 이치를 통찰하는 것과 같다. 작지만 작지 않고 크지만 크지 않다. 하나의 생명이 여러 형태들로 육화(肉化)된 것은 생명이 스며들어가는 경로와 방식의 차이일 뿐, 그러한 육(肉)의 형태가 본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즐겁고 슬프게 하는 피리의 속이 비어있듯이 우리를 이끄는 모든 상(相)들은 비어있다. 비어있는 가운데 살아있고 인연의 작용으로 색-공(色空)의 왕복달리기를 동시일발의 사건으로 처리한다. 우리들의 표현으로는 긋고, 지우고, 스미고는 셋 이며 다른 것이지만 이 본질은 하나이다. 나는 가끔 불타는 배에 대한 환상을 본다. 시간의 강물위로 불타는 배가 흘러간다. 이 배에는 세 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데 이들은 각자 긋고, 지우고, 스미는 뜻의 그림을 그린다. 이 셋이 어떤 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논하든지,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불타는 배는 시간의 강물 위를 떠내려가고 있다. 이런 풍경을 보는 이라면 쓸데없는 분별지(分別智)나 안팍의 대립, 이기고 짐에 목숨을 걸지 않으리라. 더구나 절대 절명의 순간에 다시 태어 난 사람에게 이런 일들은 더욱 무의미한 일일 수밖에 없다. 

 

 

나는 임현락의 지난 전시들을 통해서 그의 주된 관심사가 자연이라는 구체영역에서 그 모든 자연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신비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단장(斷腸)의 체험과 극복을 통해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 유전자의 염기서열의 한 단위 한 단위의 신비한 역할을 체득하고 생명 그 자체를 아주 실감나는 차원에서 소화하게 된 것이다. 자신은 우주의 충만한 생명력에 연결된 하나의 작은 단위이며, 자신의 호흡은 그 힘에 연결된 작은 출입구임을 너무나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관념으로만 떠돌던 의식이 아니라 체화(體化)된 이 영혼의 힘은 허무가 아니라 비어있되 살아있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마음임을 깨닫고, 실제로 자신을 이 원칙에서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의 주제를 '나무를 긋다, 지우다, 스미다'라는 보다 적극적인 움직씨(動詞)로 나타낸 것은 일관되게 추구해온 나무작업에 대한 언어의 변용이 아니다. 이 표현들은 그의 작업이 갖는 무게중심의 위치가 실제 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실마리이다. 지난 10년간 임현락은 - 허무에서 자연으로, 자연에서 생명으로 - 작업의 초점이 서서히 이동해왔다. 이러한 이동에서 이번 전시가 갖는 특징은 그에게 있어 나무가 자신 과 떨어져 있는 대상, 그래서 그림으로 옮겨야 하는 대상이 아닌 '내 속에 있는 것이 네 안에 있고, 네 안에 있는 것은 내 속에 있다'는 물아일여(物我一如)와 주객소멸(主客消滅)의 지점에서 그림에 대한 사유가 재편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번 전시를 계기로 그는 이 새롭게 이동한 지점에서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거라고 본다. 이 지점은 눈앞의 세계가 아니라 눈 안의 세계에서 나를 행위하게 하는 근본자리이다. 그의 최근 작업에서 행위가 더욱 강조되고 있는 까닭도 눈앞의 세계에서 눈 안의 세계로 집중됨으로 써 안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보다 자유로운 작업에 대한 그의 열망을 보여준다. 임현락의 이러한 특별한 징후를 좀 더 잘 포착하길 바라는 뜻에서 나는 최근 아이들과의 산행에서 떠오른 글을 여기에 옮겨 보았다. 우리들은 서로 다른 시공에서 서로의 일을 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정서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어쩌면 이 번 전시에 내가 임현락의 그림에 대한 글을 쓰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무를 만나면 나무가 되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가 된다 

물을 만나면 같이 흐르고 

새를 만나면 같이 난다 

자연스럽게 스미고 

무심하게 변한다 

허무는 그림의 기초 

신통은 그 생명이다 

마음을 비우고 신과 통하면 

모든 일에 신이 깃든다 

떠드는 아이들이여 

더 넓은 침묵의 바다에서 

한 줄기 뼈를 응시하라 

노래와 춤이 나올 때까지 

 

 나는 더 이상 자연과 떨어진 대상이 아니며 자연 또한 나 밖의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내가 바로 나무고, 내가 바로 바람이라는 하나 됨이 이번 전시에서 필자가 느낀 임현락 그림의 메시지이다. 아니 굳이 그 곳까지 갈 것 없지 하며 '임제가 바로 주먹을 내지르는 현장'*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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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황벽선사에게 불법의 큰 뜻을 물었다가 세 번 다 얻어맞은 임제는 대우스님과의 문답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황벽에게로 돌아온 임제는 스승이, "대우 이 화상, 오기만 오면 한 방 먹여 주리라"는 호통을 듣고 "기다릴게 뭐 있습니까? 지금 바로 한 방 먹이시지요."하며 스승 황벽의 뺨을 한 대 후려갈긴다. 임제의 이 '한 방 먹이기'는 시간, 공간, 차원을 초월하고 너와 나의 구별이 소멸된 지점으로 여기서 이 세 사람은 하나가 된다. 

 

제5회 개인전 서문, 갤러리우덕, 2002년


 

겨울나무 Winter Trees, Charcoal on paper Hanji, 94x56m, 2002 

 

겨울나무 Winter Trees, Charcoal on paper, 106x75cm, 2002 

겨울나무 Winter Trees, Charcoal & Pastel on Paper, 106x75cm,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