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바람․ 갈대, 그 명징한 생명력

                                       

                               -윤재갑(미술평론/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

 

아마도 ‘위기의 ....’라든지 ‘기로에 선 ...’이라는 말은 1950년대 이후부터 지금 까지 우리 화단에서 가장 많이 하고 들어온 얘기중 하나일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식민지배와, 중반의 민족 분단, 후반의 개발 독재와 급격한 서구 자본주의 사회로 의 통합이 지난 100 여 년 우리가 걸어온 길이다. 민족 전체 역사에서도 20 세기는 모질게 힘든 세기중의 하나였으니, 문화면에서야 오죽했겠는가? 사회 어느 분야도, 누구도 이 세 가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얼마 전에 타계한 화단 의 한 원로는 친일 시비에, 다른 한 분은 독재 정권에 메인 몸이었다. 동양화니 한국화니 하는 명칭 문제도, 한국 정체성 문제도, 작금의 겸재의 진경에 대한 논란도 ‘한국적 민주(족)주의’를 내세운 70년대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6.25의 잿더미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70, 80년대는 상대적으로 회화 내적인 논쟁에 주력하여 몇몇 알찬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과도한 요약, 생략의 위험을 감수하고 돌이켜 보면, 寫生을 바탕으로 한 실경산수에서 ‘진경’에로 이르는 길이 한 축이고, 서구 앵포르맬을 접목시킨 추상적 경향, 그리고 ‘동양화 자체의 추상성’을 강조한 수묵화 운동이 다른 한 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시작된 이러한 시도가 지금도 여전히 ‘위기설’ ‘침체설’의 진원지 역할을 하는 이유는 ‘민족’, ‘정체성’, ‘오리엔탈리즘’을 강조하면서도 방법론적으로는 안일하고 허술한 옥시덴탈리즘에 의탁해왔거나, 재료 자체일 뿐인 지필묵에 과도하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오히려 회화의 내적 자생적 발전을 저해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우주의 기>와 <민족의 얼, 민족적 자아>가 <일획의 먹> 속에 녹아 있다(몇몇 그룹전 서문에서 임의 발췌)’는 언명들에 내재된 관념적이고 국수적이며 재료에 대한 신비화, 그리고 이를 토대로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타자화 시킨 허구적 오리엔탈리즘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획 대 수 많은 붓질(준) 사이의 방치된 간극이다. 누구는 단 한 번의 붓질에 우주의 기를 담을 수 있다하고, 누구는 만 번의 주의 깊고 성실한 붓질이 동양 회화의 본령이라 한다. 둘 사이의 이러한 견해차는 때로 생산적인 성취를 이루기도 했지만 寫意 대 形似라는 관념적인 이중 구도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양분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임현락의 작업은 이러한 선배들의 득실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기적으로는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중반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화단 곳곳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일연회>, <묵조회> 선배들이 임현락에게는 보다 직접적인 자양분이었다. 특히 뚜렷한 한 가지 이념이나 방향 감안에 가두려 하지 않고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한 묵조회의 자유분방함이 임현락의 기질과 잘 맞았을 것이다. 실제로 <묵조회>는 도저히 단일한 하나의 그룹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양식과 기질이 공존하며 싸우는 격전지 같은 느낌을 준다. 임현락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대로> 그룹도 동일하다. 당시 화단의 거의 모든 경향들(수묵, 진경산수, 설치, 민화와 무속의 차용, 추상표현주의)을 의도적으로 한 그룹 안에 배치하여 치열한 내부적 상호비판을 유도한 이들의 성취가 임현락의 그간 작업에 공존하며 다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두번의 개인전을 거치면서 임현락의 화면은 먹과 선의 자율적 움직임과 여백의 적극적 개입을 보여준다. 재현적이지 않고 지시적이지 않은 먹․선은 마치 화면이라는 지지대를 벗어 난 듯 허공에서 분방하게 흩어져 버린다. 특히 이번의 세 번째 개인전에서 갈대를 붓 삼아 그린 소나무 연작은 그가 氣와 여백이라는 오랜 회화적 요소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임현락에 있어 氣와 여백은 동일한 것이다. 그가 쓰는 眞形이라는 말은 捨形取常의 常과 같은 의미이다. 가시적인 形을 버리고 사물의 眞形, 즉 사물의 비가시적 氣를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백과 氣와 眞形은 비가시성에서 동일하다. 이 점에서 임현락의 작업은 우리에게 동양 회화가 風水地理와의 긴밀한 연관에서 출발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風水地理에서 바람(風)은 山과 水를 에워싼 보이지 않는 호흡이자 생명이다. 이러던 것이 隋․唐대를 거치며 바람이나 호흡이라는 자연스러운 표현 대신 氣나 寫意, 傳神이라는 관념적인 단어로 바뀌어 간 것이다. 동양에 있어서 회화의 자립 과정은 바로 風水에서 山水로의 변천 과정이자, 우리의 믿음과는 반대로 자연의 철학화, 관념화와 동일하다. 임현락은 최근작에서 바람(風)을 주요소로 하여 이러한 회화의 시원성을 탐색하고 風, 山, 水의 조화를 복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시성(山, 水, 形)과 비가시성(風, 氣, 常, 여백)의 조화, 즉 山, 水에 어떻게 비가시적인 氣를 불어넣어 생동케 할 것인가는 풍수와 동양회화의 공통된 이상이자 임현락이 최근작에서 고민하는 경계이다. 바람은 분명 존재하나 보이지 않고, 호흡은 결코 보이지 않으나 사물의 생명을 유지시킨다. 이처럼 임현락의 화면에 흐르는 여백이나 바람은 풍수에서의 風(바람)과 동일하며, 화면에 그려진 소나무가 살아있도록 만드는 생명이자 숨쉼이다. 이러한 호흡을 통해 작가는 사물과 교감하고 그것을 화면에 옮긴다. 그것은 동양 회화의 자기 전개 과정에서 지나치게 관념화된 정형 산수의 틀(氣나 寫意, 傳神, 먹의 유희, 운필의 묘와 갖가지 준법과 방작)을 들어내고 사물과 생명의 본질을 자기화 했기에 가능한 성취이다. 그러기에 그의 소나무는 살아서 명징한 생명의 숨소리를 서걱서걱 내는 것이다.

정형화되고 관습적인 먹의 유희, 운필의 묘와 갖가지 준법에서 한 발 벗어났을 때 일획과 만 번의 붓질 사이의 대비는 또 다른 의미를 띤다. 아니 임현락은 모필이 아닌 갈대 묶음을 잡으면서부터 이러한 대립적 간극에서 벗어나있다. 모필에 비해 수분 삼투가 훨씬 약한 갈대 다발은 아예 먹의 유희나 운필의 묘를 허용치 않고 전통적인 준법을 펼칠 수 없게 만든다. 아니, 종이에 갈대를 대기도 전에 먹물이 후두둑 흩어져 내릴 지경이다. 그러니 자연히 재료의 물성 자체를 관념적으로 우러르지도 않고 먹과 운필의 묘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모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갈대를 사용함으로써 운동 반경은 배가 되고 화면의 역동과 긴장은 고조된다. 

단순히 붓 대신 갈대를 잡거나, 먹의 울림이나 유희를 지극히 제한한 것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생선 꼬리나 대걸레를 사용한 작가도 있고, 이물질을 첨가하여 전통적인 먹 맛을 확장하거나 제어한 작가도 있고, 유채처럼 균등하게 사용하여 색면 추상을 시도한 작가도 있다. 그의 작업이 지금에 와서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동양 회화의 시원에 거슬러 도달하면서도 새로운 방법적, 재료적인 모색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료의 물성 자체에 대한 관념적 과신을 경계하면서도 오히려 그 확장을 꾀하고, 파편적인 옥시덴탈리즘을 거부하면서도 동양 회화의 장점을 튼튼히 쌓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하고 다층위적인 실험의 출발점이 최근 그의 작업이다. 아울러 위기와 침체는 미술시장의 위기요 침체이지 회화 자체의 그것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근래에 이룩한 기술의 발달은 창작과 수용 모두에서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도 사실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그의 작업이 이러한 가능성의 한 가운데에 서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닌가 한다.

                                           

-제4회 개인전 서문(갤러리 아트사이드, 2001년)

 

 

Fine tree & Wind & Reed, Installation view, Gallery Artside, 2001


 

Fine tree & Wind & Reed, Installation view, Gallery Artside, 2001

 

솔, 바람 갈대 Fine tree & Wind & Reed,135x100cm, Ink on paper Hanji, 2001

솔, 바람 갈대 Fine tree & Wind & Reed,172x138cm, Ink on paper Hanji, 2001

솔, 바람 갈대 Fine tree & Wind & Reed,172x138cm, Ink on paper Hanji, 2001

솔, 바람 갈대 Fine tree & Wind & Reed, 138x172cm, Ink on paper Hanji, 2001

솔, 바람 갈대 Fine tree & Wind & Reed, per 138x172cm, Ink on paper Hanji, 2001

솔, 바람 갈대 Fine tree & Wind & Reed, 90x60cm, Ink on paper Hanji, 2001

솔, 바람 갈대 Fine tree & Wind & Reed, 90x60cm, Ink on paper Hanji, 2001